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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87개의 검색 결과를 찾았습니다.

상세연보1122

  • 1994년 4월 10일 (불기 2538년)
    전국승려대회가 오후 1시 조계사에서 스님 2,500여 명과 재가불자 1,0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봉행되다. 4.10 조계사 승려대회에서 △종정 불신임 △총무원장 해임 및 모든 공직 박탈 △개혁회의 출범 등이 결의되다. 개혁회의 의장에 월하月下스님, 부의장에 설조雪照ㆍ종하스님이 추대되고, 상임위원장에 탄성呑星스님이 선임되다. 경찰이 재투입되다.
    관련사료
    조계종'개혁회의'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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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4년 4월 9일 (불기 2538년)
    종정 서암스님이 승려대회를 금한다는 교시를 발표하다.
  • 1994년 4월 5일 (불기 2538년)
    혜암慧菴스님(원로회의 부의장)이 소집한 원로회의에서 총무원장 사퇴 및 4월 10일 승려대회 소집을 결의하다.

    교수, 문인, 법조인, 언론인 등 각계 인사들의 폭력배 난동을 방관한 정부 비판과 총무원장 사퇴 요구가 잇따르는 가운데 가톨릭, 개신교, 원불교 지도자까지 사상 유례없는 종교탄압이라며 경찰을 강하게 비판하다.
  • 1994년 4월 3일 (불기 2538년)
    종정 서암스님이 사태 수습을 위한 원로회의 소집 교시를 발표하다.
  • 1994년 4월 (불기 2538년)
    개혁회의 징계위에 승적 정정 문제로 회부되다.
    징계위 회부는 정대스님과 함께 개혁회의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도 있다. 개혁회의가 143명에 대해 징계를 결의해 그중 의현, 보일, 규필, 원두, 무성, 종원, 준제, 진암, 진경스님 등 9명에 대해서는 체탈도첩(멸빈)을 확정했다.
  • 1994년 3월 30일 (불기 2538년)
    중앙종회가 제112회 임시회를 열어 제27대 총무원장으로 의현스님을 선출하다.
  • 1994년 3월 28일 (불기 2538년)
    범종추 소속 스님과 신도들이 종단개혁을 위한 제2차 구종법회를 열고 농성을 계속하다.
  • 1994년 3월 26일 (불기 2538년)
    범종추 소속 스님 200여 명이 서울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에서 상무대 비리 진상규명과 의현스님의 총무원장 3선 연임 반대 구종법회를 열고, 총무원장과 집행부 사퇴를 요구하다. 법회 후 청화스님 등 범종추 대표 10여 명이 단식농성에 들어가다.
    관련사료
    종단개혁'승려 2백명 거리행진 '상무대'진상규명등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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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4년 3월 23일 (불기 2538년)
    실천승가회, 선우도량, 중앙승가대학생회, 동국대석림동문회 등 8개 승가단체가 '범승가종단개혁추진회'(상임대표 청화ㆍ시현ㆍ도법스님, 이하 범종추)를 결성하다.
  • 1994년 1월 17일 (불기 2538년)
    중앙종회가 제111회 임시회를 열어 서암스님의 종정 추대를 공식화하기로 하고, 종헌종법 개정은 차기 종회로 다시 미루다.
    관련사료
    조계종 개혁안 종회처리 또 미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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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3년 11월 18일 (불기 2537년)
    중앙종회가 제110회 정기회를 열어 제8대 종정으로 원로회의가 추대한 서암스님을 수용하다.
    관련사료
    조계종 중앙종회 관심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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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3년 7월 28일 (불기 2537년)
    중앙종회가 제109회 임시회를 열어 재산 등록 안건 등을 다루다. 관련해 종헌에 재산 등록 불응 사찰 주지에 대한 총무원장의 직권 면직 규정(제73조)을 개정하다.
    관련사료
    조계종'재산등록'종헌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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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3년 7월 14일 (불기 2537년)
    총무원이 원로회의 결의에 따라 전국 사찰의 재산을 등록 받아 실사 후 수입 지출 내역과 함께 공개하겠다고 천명하다.
  • 1993년 3월 9일 (불기 2537년)
    실천불교전국승가회(회장 청화靑和스님, 1992년 창립, 이하 실천승가회)가 종회의원 직선제와 겸직금지를 골자로 한 조계종 종헌종법 개정을 촉구하는 공개청원서를 총무원과 원로회의, 중앙종회에 제출하다. 실천승가회는 불교계의 사회운동을 이끌던 불교정토구현전국승가회(1986년 창립)와 대승불교승가회(1988년 창립)를 비롯해 불교계 진보세력들로 구성된 승가 단체다. 불교정토구현전국승가회는 사회의 억압구조를 타파하고 정토를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지선, 청화 스님 등이 이끌었다. 대승불교승가회는 사회 민주화와 종단 개혁 기치를 내걸고 활동(위 연보 참조)했는데, 90년대 들어와 사회민주화가 제도적으로 뿌리를 내리면서 두 단체가 따로 활동할 이유가 없어졌고 실천불교전국승가회의 깃발을 올리며 결합했다.
  • 1992년 8월 14일 (불기 2536년)
    조계종 제10대 중앙종회 의원이 되다.
    스님은 직능대표 간선으로 피선되다. 제10대 중앙종회(의장 종하鍾夏스님)는 24개 교구본사에서 직접선거로 선출된 48명과 간선선출위원회에서 뽑는 직능대표 27명 등 총 75명의 스님들로 구성됐다. 종회 의원은 본사 또는 주요 사찰의 주지를 겸하고 있었고, 간선선출위원회 위원장은 총무원장이었다. 한편, 조계종 종단이 2개의 총무원 체제로 나뉘어 1년여 가까이 벌인 분립 사태는 제10대 종회 구성을 계기로 미봉됐다.
    관련사료
    총무원'두조각'1년 조계종분규 진정국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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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2년 4월 29일 (불기 2536년)
    성철性徹스님이 원로회의의 종정 추대를 수락하다. 성철스님은 제6대 종정으로 91년 1월 임기를 마쳤으나 종단에서 제7대 종정 추대와 종권을 둘러싼 내분이 있어 왔다. 이날 종정직을 수락한 성철스님은 다음날인 석탄일에 법어를 발표했다.
  • 1992년 1월 16일 (불기 2536년)
    조계종단은 90년부터 강북 총무원(의현義玄스님)과 강남 총무원(벽암碧岩스님)으로 나뉘어 갈등을 빚었는데, 정부 중재로 양측이 30인 제도개혁구성위원회 구성을 합의했으나 원로회의(의장 서암西庵스님)의 반대로 무산되다.

    원로회의는 방장이나 조실 등 원로 스님들로 구성되는 종단의 최고권위기구다. 원로회의가 정식 발족한 것은 1980년대 초로 과거 장로회의가 발전된 형태였다. 종헌에는 승랍 40세, 연령 65세 이상 종사급 원로 비구로 구성하며 의원은 중앙종회에서 추대하도록 되어 있다. 임기는 10년이고 정원은 10인 이상 21인 이내다. △종헌 개정안과 △총무원장에 대한 인준 및 불신임 결의안 △중요 종책의 조정 등을 원로회의 의결을 거치도록 되어 있다.
  • 11월 (불기 544년)
    5년 동안 맡았던 과천종합사회복지관장 소임을 마치다.
  • 1991년 9월 (불기 2535년)
    '정법수호회' 회장 자격으로 중흥회가 개최한 전국승려대회에 참가하다.
    당시 종정 추대 문제에서 비롯돼 총무원장 퇴진을 놓고 총무원(의현스님) 측과 반 총무원(중흥회 능혜스님 등) 측이 갈등을 빚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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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무리냐 조계종 내분「분종」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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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8년 3월 (불기 2532년)
    '대승불교승가회'에 참여하다.
    대승불교승가회는 1987년 6월항쟁 당시 불교계의 민주화 열기를 결집시킨 ‘정토구현전국승가회’(1986년 6월 5일 출범)의 맥을 잇는 승가조직이다. 송산松山, 종림宗林, 명진明盡, 자승慈乘, 종태宗跆, 성문性門, 현응玄應, 각신覺腎, 원택圓澤, 설봉雪峰, 주영周暎, 여연如然 스님 주도 아래 30~40대 선승과 학승 등 소장 승려 1백여 명이 참여했고, 초대 회장은 송산스님이 맡았다. 3월 25일 서울 성북구 안암동 소재 개운사에서 창립총회를 열었다. 조직은 산하에 이념교육, 제도교육, 인권, 통일, 노동, 공해대책, 민족문화 등 7개 위원회를 구성하고 부설 민족불교연구소를 두었다. 88 서울올림픽 시기에 동국대석림회 등 10여 단체와 함께 ‘민족화합공동올림픽추진본부’를 결성하여 통일운동을 펼치면서 80년대 불교운동의 한 획을 그었다.
    관련사료
    佛敎界(불교계)에 改革(개혁)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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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佛敎(불교) 사회참여운동에 새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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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속의 오늘] 정토구현전국승가회 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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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대중과 국민여러분에게 드리는 글 - 대승불교 승가회 창립 취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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