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8년 11월 11일 (불기 2542년)
총무원장 선거를 하루 앞두고 총무원장 후보 월탄月誕스님을 지지하는 250여 명이 조계사에서 승려대회를 연 후 총무원 청사를 점거하고, 종정 월하스님의 총무원장 3선 반대 교시를 명분으로 종권을 위임받았다면서 '정화개혁회의'를 구성하다. 종헌 중단 사태가 벌어지다.
-
1998년 11월 9일 (불기 2542년)
중앙종회 사무처장에서 물러나다.
-
1998년 10월 (불기 2542년)
제29대 총무원장 선거에 월주月珠스님 3선 출마 여부를 놓고 공방이 벌어지다. 월주스님은 80년 6개월여 간 총무원장(제17대)으로 재임한 바 있어 출마의사를 밝힌 다른 스님들이 "월주스님은 총무원장 3선에 해당하여 1차에 한해 중임할 수 있다는 종헌에 위배된다"며 불출마를 종용하다. 반면, 월주스님 측은 "당시 신군부에 의해 강제 사퇴당한 것으로 94년 제정 공포된 종헌을 소급 적용할 수 없다"고 반발하다. 총무원장은 94년 종단 개혁을 통해 제정 공포된 종헌에 따라 전국 24개 교구에서 뽑은 선거인단 240명과 중앙종회의원 81명이 선출하는데, 교구본사 주지는 교구종회의원 2명을 포함해 선거인단 12명을 결정하도록 되어 있어 큰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해 8개 교구에서 임기 만료로 치러진 주지 직접 선거는 총무원장 선거 대리전 양상을 띠었다.
-
1998년 3월 26일 (불기 2542년)
과천 별양동에 문을 연 과천종합사회복지관 개관식을 갖다.
과천복지관은 저소득층, 장애인 및 기타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가정복지사업부터 아동, 청소년, 장애인, 노인, 지역복지사업을 활발히 벌여 지역내 종합복지관으로 자리매김했다.
-
1998년 2월 (불기 2542년)
연주암의 환경친화적 불사와 무료 점심 공양이 회자되다.
스님이 주지에 부임한 이래 공사가 중단돼 있던 선불전을 천수관음전으로 바꿔 불사를 회향, 지하에는 현대식 주방시설과 식탁을 갖췄다. 공양간 한켠에 기도객들이 묵어갈 수 있는 방사를 지었고, 대중스님들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요사채도 보수했다. 연주암 상징인 연주대에 기와불사와 종불사도 마쳤고, 효령대군 영정은 종각 위쪽에 효령각을 신축해 모셨다. 고지대라 겪는 식수난을 3년여에 걸친 시추 노력 끝에 암반수를 찾아 해결했고, 오폐수 및 화장실 자체 정화 시설을 만들었다. 또한, 사찰 토지를 무단 사용중이던 기상대 관측소를 철거시켰고, 군부대로부터 헬기장 유류고 등 1,500평을 반환받았다. 연주암 복원을 위해 관악사지 발굴사업을 추진하여 1250나한 조성불사와 함께 나한기도도량으로 가꿔나갔다.
-
1997년 12월 9일 (불기 2541년)
'민족문화 수호와 전법을 위한 조계종 지도자회의'가 서울 양재동 교육문화회관에서 교구본사 주지, 중앙종회의원, 수말사 주지 등 300여 스님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리다.
-
1997년 12월 (불기 2541년)
연주암이 위탁 운영하는 조계종 사회복지재단 과천종합사회복지관의 관장을 맡아 지역 복지사업과 불교복지에 원력을 세우다.
과천 시민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지역신문 『과천21』 발행인을 맡다.
-
1997년 8월 5일 (불기 2541년)
연주암 신도들의 신행활동을 독려하다.
연주암 신도들이 과천 등지 경로당에서 점심 공양과 무의탁 노인 성금 보시 관련해 스님이 "신도회의 자발적인 노력에 감사한다"며 "사찰에 찾아오기만을 기다리기보다는 사회의 어두운 곳을 직접찾는 보살행이 참불자임"을 강조하다.
-
1997년 3월 (불기 2541년)
종정 월하스님이 원로회의에 종정직 사표를 제출하다.
-
1996년 11월 22일 (불기 2540년)
'환경보존과 민족문화 수호를 위한 전국 본말사 주지 결의대회'가 오후 2시 조계사에서 열리다. 종단 산하 전국 본말사 주지스님 3천여 명과 신도 500여 명이 참석하다. 결의문을 통해 "가야산ㆍ모악산 등 전국의 사찰주변 자연환경이 행정관료와 기업가들에 의해 훼손되는 사태를 주목해왔다"며, 사찰 주변의 무분별한 개발 중단과 불교계에 대한 외부개입 배격을 요구하다.
-
1996년 11월 13일 (불기 2540년)
제11대 중앙종회(의장 설정스님) 후반기 사무처장에 임명되다.
종회에 화범스님의 사표 제출로 공석이었던 사무처장 임명동의안이 찬반투표에 붙여져 28표의 찬성으로 임명되다.
-
1996년 9월 2일 (불기 2540년)
중앙종회가 제122회 임시회에서 산속 사찰에서 뽑아올린 생수를 시중에 판매하는 사업계획을 논의하다.
-
1996년 4월 (불기 2540년)
중앙종회가 제120회 정기회에서 전남 장성 백양사에 조계종 5번째 총림인 고불古佛총림을 설치키로 결의하고 강원 율원 선원 염불원을 갖추도록 결정하다.
-
1995년 8월 25일 (불기 2539년)
중앙종회와 총무원 집행부, 실천승가회 소속 스님 471명이 '5.18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한 특별법 제정과 특별검사제 도입'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다.
-
1995년 6월 22일 (불기 2539년)
중앙종회가 제117회 임시회를 열어 개혁회의 전후과정에서 징계를 당한 33명에 대해 사면복권 및 징계경감 조치하다. 한편, 지방자치선거와 남북 쌀회담을 앞두고 불교교단이 분열로 비칠 수 있는 행동을 자제키로 결의하다. 또한, 조계사 내 농성 중이던 한국통신노조원들에 대한 경찰의 강체 해산 관련해 정부의 사과와 책임자 문책을 촉구하다. 6월 6일 조계사에 경찰이 투입됐고, 16일 이홍구 총리가유감을 발표한 바 있다.
-
1995년 1월 17일 (불기 2539년)
조계종 총무원장 월주스님이 태고종 총무원장 서봉스님과 만나 서울 봉원사, 백련사, 전남 선암사 등 10여 개 사찰을 둘러싼 두 종단의 분규 해결방안을 논의하다. 이들 사찰은 당시 법적으로 조계종 소유였으나 태고종이 사용하고 있었다.
-
1994년 12월 8일 (불기 2538년)
개혁회의가 6개월 시한에서 2개월 연장한 활동을 마치고 해산하다. 개혁회의는 실천승가회와 선우도량 소속 스님들이 이끌었다. 총무원장 선거와 함께 개혁회의가 해산되자, 도법, 수경 등 선우도량의 중견 스님들은 산중으로 돌아가고, 남은 사람들은 종단정치의 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
1994년 9월 27일 (불기 2538년)
개혁회의가 중앙종회의원과 교구종회에서 선출하는 선거인단에 의한 총무원장 선출 및 본사주지 중앙종회 의원 겸직 금지 등을 담은 종헌 개혁안을 확정짓다. 개혁회의는 △정법종단의 구현 △불교자주화 실현 △종단운영의 민주화 △청정교단의 구현 △불교의 사회역할 확대 등 5대 지표를 설정하고 종단 개혁에 나서 총무원장 선거권을 320여 명으로 확대하고, 교구본사 주지, 중앙종회의원, 교구종회의원 등 종단의 주요 소임자를 직접 선거로 선출케 했다. 또, 종무행정 체계를 총무원, 교육원, 포교원으로 분리해 각각의 역할을 전문성에 근거해 시행할 수 있도록 하고, 총무원의 역할을 보완하고 독주를 견제할 수 있도록 중앙종회의 권한을 확대시켰다. 종회의원은 종단의 다른 주요 소임을 맡지 못하도록 하는 대신 종회에서 직무상 행한 발언에 대해 면책특권을 부여하고, 징계를 할 경우 종회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등 그 지위를 보장했다. 사법기능인 호계원의 소관업무도 확대해 선거 관련 심판 등을 관장하게 하고, 특히 종단 내부에서 일어나는 분쟁을 종단 안에서 처리할 수 있도록 했다. 종단 재정의 공개운영을 원칙으로 함을 종헌에 명문화하고, 사설사암의 종단 등록을 의무화하면서도 운영의 독립성을 인정토록 했다. 사찰이 재산을 처분하기 위해선 감사기관의 조사를 거쳐 총무원의 허가를 얻도록 하고, 총무원이 종단 재산을 처분하기 위해선 중앙종회의 동의를 얻게 했다. 참선수행 도량인 선원을 기초선원과 전문선원으로 구분하고, 기초선원 이수자는 종단의 기본교육 이수자와 동등 자격을 부여해 전문선원에 입방할 수 있도록 했다. 또, 단일 계단을 운영하는 동시에 계를 받기 위해선 종단에서 정한 의무교육을 반드시 이수하도록 했다.
-
1994년 4월 26일 (불기 2538년)
서암스님이 종정직을 사임하다.
-
1994년 4월 13일 (불기 2538년)
의현스님이 총무원장 사퇴를 발표하고, 원로회의가 개혁회의를 인준하다. 경찰은 조계사에서 철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