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8년 11월 30일 (불기 2542년)
종헌종법 수호를 위한 전국승려대회(대회장 탄성스님)가 오후 2시30분 조계사 앞에서 스님 1,200여 명과 신도 등 2,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리다. 대회에 참석한 스님들은 월하 종정 불신임과 정화개혁회의의 즉각 해산 및 총무원 청사에서 철수, 총무원장 선거 실시 등을 결의하다. 대회를 마친 스님과 신도들이 총무원 청사 진입을 시도, 이를 저지하는 정화개혁회의 측 스님들과 폭력 사태가 벌어지다.
-
1998년 10월 (불기 2542년)
제29대 총무원장 선거에 월주月珠스님 3선 출마 여부를 놓고 공방이 벌어지다. 월주스님은 80년 6개월여 간 총무원장(제17대)으로 재임한 바 있어 출마의사를 밝힌 다른 스님들이 "월주스님은 총무원장 3선에 해당하여 1차에 한해 중임할 수 있다는 종헌에 위배된다"며 불출마를 종용하다. 반면, 월주스님 측은 "당시 신군부에 의해 강제 사퇴당한 것으로 94년 제정 공포된 종헌을 소급 적용할 수 없다"고 반발하다. 총무원장은 94년 종단 개혁을 통해 제정 공포된 종헌에 따라 전국 24개 교구에서 뽑은 선거인단 240명과 중앙종회의원 81명이 선출하는데, 교구본사 주지는 교구종회의원 2명을 포함해 선거인단 12명을 결정하도록 되어 있어 큰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해 8개 교구에서 임기 만료로 치러진 주지 직접 선거는 총무원장 선거 대리전 양상을 띠었다.
-
1998년 2월 (불기 2542년)
연주암의 환경친화적 불사와 무료 점심 공양이 회자되다.
스님이 주지에 부임한 이래 공사가 중단돼 있던 선불전을 천수관음전으로 바꿔 불사를 회향, 지하에는 현대식 주방시설과 식탁을 갖췄다. 공양간 한켠에 기도객들이 묵어갈 수 있는 방사를 지었고, 대중스님들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요사채도 보수했다. 연주암 상징인 연주대에 기와불사와 종불사도 마쳤고, 효령대군 영정은 종각 위쪽에 효령각을 신축해 모셨다. 고지대라 겪는 식수난을 3년여에 걸친 시추 노력 끝에 암반수를 찾아 해결했고, 오폐수 및 화장실 자체 정화 시설을 만들었다. 또한, 사찰 토지를 무단 사용중이던 기상대 관측소를 철거시켰고, 군부대로부터 헬기장 유류고 등 1,500평을 반환받았다. 연주암 복원을 위해 관악사지 발굴사업을 추진하여 1250나한 조성불사와 함께 나한기도도량으로 가꿔나갔다.
-
1994년 4월 15일 (불기 2538년)
중앙종회가 제113회 임시회를 열어 개혁회의에 종단의 전권을 이양하고 제10대 중앙종회를 자진 해산하다. 이에 앞서 원로회의의 제27대 총무원장 선출 인준 거부에 따른 총무원장 불신임과 종정 불신임 건을 확인하고 의결하다.
-
1991년 9월 (불기 2535년)
'정법수호회' 회장 자격으로 중흥회가 개최한 전국승려대회에 참가하다.
당시 종정 추대 문제에서 비롯돼 총무원장 퇴진을 놓고 총무원(의현스님) 측과 반 총무원(중흥회 능혜스님 등) 측이 갈등을 빚고 있었다.
-
1988년 3월 (불기 2532년)
'대승불교승가회'에 참여하다.
대승불교승가회는 1987년 6월항쟁 당시 불교계의 민주화 열기를 결집시킨 ‘정토구현전국승가회’(1986년 6월 5일 출범)의 맥을 잇는 승가조직이다. 송산松山, 종림宗林, 명진明盡, 자승慈乘, 종태宗跆, 성문性門, 현응玄應, 각신覺腎, 원택圓澤, 설봉雪峰, 주영周暎, 여연如然 스님 주도 아래 30~40대 선승과 학승 등 소장 승려 1백여 명이 참여했고, 초대 회장은 송산스님이 맡았다. 3월 25일 서울 성북구 안암동 소재 개운사에서 창립총회를 열었다. 조직은 산하에 이념교육, 제도교육, 인권, 통일, 노동, 공해대책, 민족문화 등 7개 위원회를 구성하고 부설 민족불교연구소를 두었다. 88 서울올림픽 시기에 동국대석림회 등 10여 단체와 함께 ‘민족화합공동올림픽추진본부’를 결성하여 통일운동을 펼치면서 80년대 불교운동의 한 획을 그었다.
관련사료
[역사 속의 오늘] 정토구현전국승가회 출범
바로가기
관련사료
불교대중과 국민여러분에게 드리는 글 - 대승불교 승가회 창립 취지문
바로가기
-
1986년 1월 23일 (불기 2530년)
성남 망경암望京庵 주지를 맡다.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복정동(553-1) 영장산에 있는 망경암에선 서울이 한 눈에 내려다보여 서울을 바라보는 암자라는 뜻의 이름이 붙었다. 스님은 망경암에 그해 8월 20일까지 있었다.
망경암은 고려 말과 조선 초 임금들이 나라와 백성의 평안을 빌었던 곳이다. 조선조 세종의 7째 아들인 평원대군과 손자 제안대군이 단을 설치하고 분향하여 충효를 다짐하던 곳으로 전해진다. 칠성신앙과 관련된 도량으로 암벽을 깎아내고 이 안에 부조로 불상을 새겨 넣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2호 마애여래좌상이 있다. 마애여래좌상 주변에는 광무 7년(1897년) 이규승이 관음상을 새겼다는 기록이 있다. 마당 한쪽에 부처님이 내려주신 복된 감로수가 마르지 않는 복우물이 조성되어 있다. 성남시 복정동 지명은 이 우물에서 비롯됐다. 사찰 전각들로는 대웅전, 삼성각, 미륵전이 있는데, 모두 근래 조성된 것들이다. 거대한 미륵대불과 5층석탑도 있다. 망경암 자연암벽에 감실을 만들고 그 안에 불상을 모셨다.
-
1982년 7월 14일 (불기 2526년)
이천 영월암映月庵 주지의 소임을 맡다.
영월암은 경기도 이천시 설봉산 중턱 관고동 438번지에 위치한 조계종 제2교구본사 용주사의 말사이다. 스님은 영월암 주지를 그해 12월 16일까지 맡았다.
영월암은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창건 당시 절 이름은 북악사北嶽寺라 했었고, 조선 영조 50년(1774) 영월 낭규대사가 중창하고 영월암이라 고쳐 불렀다. 1911년 보은스님이 중건했고, 1941년 명칠스님이 대웅전을 중창했다. 현존하는 당우는 대웅전과 동별당ㆍ요사채 3동이다. 대웅전 앞에는 연대를 알 수 없는 삼층석탑이 있고, 신라 때 것으로 추정되는 뛰어난 조각솜씨의 석조광배와 연화대좌(향토유적 제3호)가 있다. 연화대좌 위에는 근래 조성한 석조여래좌상이 안치되어 있다. 대웅전 뒤편 바위에 조성된 보물 제822호인 마애여래입상이 있다. 절 입구에는 수령 50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있다.
-
1980년 (불기 2524년)
설악산을 내려와 선방으로 향하다.
경남 양산 통도사, 대구 팔공산 동화사, 경북 문경 희양산 봉암사 선원 등지를 돌며 수행 정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