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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월 16일 (불기 2536년)
조계종단은 90년부터 강북 총무원(의현義玄스님)과 강남 총무원(벽암碧岩스님)으로 나뉘어 갈등을 빚었는데, 정부 중재로 양측이 30인 제도개혁구성위원회 구성을 합의했으나 원로회의(의장 서암西庵스님)의 반대로 무산되다.
원로회의는 방장이나 조실 등 원로 스님들로 구성되는 종단의 최고권위기구다. 원로회의가 정식 발족한 것은 1980년대 초로 과거 장로회의가 발전된 형태였다. 종헌에는 승랍 40세, 연령 65세 이상 종사급 원로 비구로 구성하며 의원은 중앙종회에서 추대하도록 되어 있다. 임기는 10년이고 정원은 10인 이상 21인 이내다. △종헌 개정안과 △총무원장에 대한 인준 및 불신임 결의안 △중요 종책의 조정 등을 원로회의 의결을 거치도록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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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9월 (불기 2535년)
'정법수호회' 회장 자격으로 중흥회가 개최한 전국승려대회에 참가하다.
당시 종정 추대 문제에서 비롯돼 총무원장 퇴진을 놓고 총무원(의현스님) 측과 반 총무원(중흥회 능혜스님 등) 측이 갈등을 빚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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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3월 18일 (불기 2535년)
안양 삼막사三幕寺 주지를 맡다.
삼막사는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삼성산(석수1동 241ㆍ54)에 있는 조계종 제2교구본사 용주사의 말사이다. 스님은 삼막사 주지를 1994년 1월 18일까지 맡았다.
삼막사는 통일신라 677년(문무왕 17) 원효ㆍ의상ㆍ윤필 3대사가 관악산에 들어와 막을 치고 수도하다가 지은 사찰이다. 기록에 의하면,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신라 말 도선이 중건하여 관음사觀音寺라 개칭했다고 한다. 이후 고려 태조가 중수하여 삼막사라 하였고, 1348년(충숙왕 4) 나옹이 이 절에 머무르면서 수도하였다. 조선 개국 때인 1394년(태조 3)에는 왕사 무학이 이 절에서 국운의 융성을 기원했는데, 이러한 인연으로 1398년 왕명에 의해 중건되었다. 그 뒤 몇 차례의 중건과 중수를 거쳐 1880년(고종 17) 의민이 명부전을 짓고 이듬해 칠성각을 지은 뒤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해 명부전ㆍ망해루ㆍ대방ㆍ요사ㆍ칠성각 등이 있다. 대웅전은 무학대사가 석조기둥으로 중수한 다포계양식 건물이며, 내부에 봉안된 탱화와 범종은 광무연간에 제작된 것이다. 청명한 날 망해루에서는 서해가 보이고, 명부전 십대왕상은 이 절의 보물이다. 이밖에도 높이 2.55미터의 삼층석탑과 거북모양의 감로정석조가 있으며, 자연암석에 양각한 아미타삼존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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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3월 (불기 2532년)
'대승불교승가회'에 참여하다.
대승불교승가회는 1987년 6월항쟁 당시 불교계의 민주화 열기를 결집시킨 ‘정토구현전국승가회’(1986년 6월 5일 출범)의 맥을 잇는 승가조직이다. 송산松山, 종림宗林, 명진明盡, 자승慈乘, 종태宗跆, 성문性門, 현응玄應, 각신覺腎, 원택圓澤, 설봉雪峰, 주영周暎, 여연如然 스님 주도 아래 30~40대 선승과 학승 등 소장 승려 1백여 명이 참여했고, 초대 회장은 송산스님이 맡았다. 3월 25일 서울 성북구 안암동 소재 개운사에서 창립총회를 열었다. 조직은 산하에 이념교육, 제도교육, 인권, 통일, 노동, 공해대책, 민족문화 등 7개 위원회를 구성하고 부설 민족불교연구소를 두었다. 88 서울올림픽 시기에 동국대석림회 등 10여 단체와 함께 ‘민족화합공동올림픽추진본부’를 결성하여 통일운동을 펼치면서 80년대 불교운동의 한 획을 그었다.
관련사료
[역사 속의 오늘] 정토구현전국승가회 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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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사료
불교대중과 국민여러분에게 드리는 글 - 대승불교 승가회 창립 취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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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9월 7일 (불기 2530년)
해인사에서 열린 10.27법난 6주기 전국승려대회에 참가하다.
대회에 모인 전국의 2천여 명의 스님들은 불교자주화와 사회민주화, 자주통일을 주장하다. 9.7 해인사 승려대회 집행위원장은 월주스님, 준비위원장 종하스님, 대회장은 해인사 주지 법전스님이 맡다. 대회는 해인사 부방장 혜암스님의 법어로 시작하여 대회사, 경과보고, 불교탄압 실태보고 순으로 진행되다. 이어 사회민주화와 민족자주권 수호를 위한 불교의 사회 참여를 천명하고, 지선스님의 선언문 낭독, 초우스님의 국민에게 드리는 말씀과 발원문, 결의문을 채택하다. 석림회 성조스님의 결의문 낭독 때 지광스님이 오른쪽 손가락 4개를 잘라 ‘불자여 눈을 떠라’라는 혈서를 쓰다. 이후 스님 1천여 명이 혈서와 피켓을 들고 3.5km 떨어진 가야산 국립공원 입구까지 행진하며 ‘불교재산관리법 철폐’, ‘독재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다. 또한, 자주적 민주적 불교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불교관계 악법 철폐와 10.27법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주장하는 한편, 5.3인천사건으로 구속 수배 중인 불자들의 석방 및 정권의 불교 탄압 등에 강력 항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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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2千(천)명海印寺(해인사)서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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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7 법난을 규탄하며 불교자주쟁취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자 - 10.27 법난 6주기를 맞이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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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5월 25일 (불기 2528년)
수원포교당 주지를 맡다.
수원포교당은 현재 수원사水原寺로 개명했으나 당시는 화광사華光寺로 불렸다.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남수동 92번지에 위치해 있다. 스님은 수원포교당 주지를 1986년 1월 23일까지 맡았다.
수원포교당은 1920년 4월 8일 당시 용주사 주지 대련스님이 일반 대중들에게 불교를 포교하기 위해 법당과 관음전, 요사를 지은 게 시작이었다. 사찰 창건 이전 이곳에는 서낭당이 있었다고 하며, 지금까지 수령 300년 정도의 느티나무가 있다. 당시 지은 법당이 현재의 극락대원전이며, 관음전이 현재의 정토수행관이다. 1927년 손계조 포교사가 옥돌관음상을 봉안했고, 1957년 화광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1964년 삼존불 후불탱화, 칠성탱화, 독성탱화, 산신탱화가 극락대원전에 봉안되었고, 1973년 정하스님이 석조아미타여래상을 조성하면서 법당을 중수, 단청했다. 1980년 법전스님이 삼존불을 개금했으며, 1981년 정락스님, 1984년 자승스님 노력으로 불교 포교의 중심 역할을 하는 전국 3대 포교당의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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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불기 2523년)
강원도 설악산 백담사 봉정암에서 5개월여 동안 홀로 기도정진하다.
군 제대 후 다시 출가자 본연의 삶으로 돌아가겠다는 원력에서 기도정진에 들어가다. 당시 봉정암은 함석 지붕의 인법당과 허름한 산신각, 작은 화장실이 전부였고, 눈이 내리면 사람의 키 높이까지 쌓이고 체감온도 영하 30~40도의 매서운 칼바람이 부는 곳이었다. 맹추위에 새벽ㆍ오전ㆍ오후ㆍ저녁, 하루 4번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고, 그때마다 2시간씩 하루 8시간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서서 목탁을 쳤다.
관련사료
43. 33·34대 총무원장 자승 스님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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