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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23개의 검색 결과를 찾았습니다.

상세연보685

  • 1995년 1월 17일 (불기 2539년)
    조계종 총무원장 월주스님이 태고종 총무원장 서봉스님과 만나 서울 봉원사, 백련사, 전남 선암사 등 10여 개 사찰을 둘러싼 두 종단의 분규 해결방안을 논의하다. 이들 사찰은 당시 법적으로 조계종 소유였으나 태고종이 사용하고 있었다.
  • 1994년 12월 8일 (불기 2538년)
    개혁회의가 6개월 시한에서 2개월 연장한 활동을 마치고 해산하다. 개혁회의는 실천승가회와 선우도량 소속 스님들이 이끌었다. 총무원장 선거와 함께 개혁회의가 해산되자, 도법, 수경 등 선우도량의 중견 스님들은 산중으로 돌아가고, 남은 사람들은 종단정치의 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 1994년 11월 21일 (불기 2538년)
    조계종 제28대 총무원장에 월주月珠스님을 선출하다.
  • 1994년 11월 17일 (불기 2538년)
    제11대 중앙종회 의장에 설정雪靖스님을 선출하다.
  • 1994년 11월 7일 (불기 2538년)
    제11대 중앙과 교구 종회 의원들이 새로 피선되다.
  • 1994년 9월 27일 (불기 2538년)
    개혁회의가 중앙종회의원과 교구종회에서 선출하는 선거인단에 의한 총무원장 선출 및 본사주지 중앙종회 의원 겸직 금지 등을 담은 종헌 개혁안을 확정짓다. 개혁회의는 △정법종단의 구현 △불교자주화 실현 △종단운영의 민주화 △청정교단의 구현 △불교의 사회역할 확대 등 5대 지표를 설정하고 종단 개혁에 나서 총무원장 선거권을 320여 명으로 확대하고, 교구본사 주지, 중앙종회의원, 교구종회의원 등 종단의 주요 소임자를 직접 선거로 선출케 했다. 또, 종무행정 체계를 총무원, 교육원, 포교원으로 분리해 각각의 역할을 전문성에 근거해 시행할 수 있도록 하고, 총무원의 역할을 보완하고 독주를 견제할 수 있도록 중앙종회의 권한을 확대시켰다. 종회의원은 종단의 다른 주요 소임을 맡지 못하도록 하는 대신 종회에서 직무상 행한 발언에 대해 면책특권을 부여하고, 징계를 할 경우 종회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등 그 지위를 보장했다. 사법기능인 호계원의 소관업무도 확대해 선거 관련 심판 등을 관장하게 하고, 특히 종단 내부에서 일어나는 분쟁을 종단 안에서 처리할 수 있도록 했다. 종단 재정의 공개운영을 원칙으로 함을 종헌에 명문화하고, 사설사암의 종단 등록을 의무화하면서도 운영의 독립성을 인정토록 했다. 사찰이 재산을 처분하기 위해선 감사기관의 조사를 거쳐 총무원의 허가를 얻도록 하고, 총무원이 종단 재산을 처분하기 위해선 중앙종회의 동의를 얻게 했다. 참선수행 도량인 선원을 기초선원과 전문선원으로 구분하고, 기초선원 이수자는 종단의 기본교육 이수자와 동등 자격을 부여해 전문선원에 입방할 수 있도록 했다. 또, 단일 계단을 운영하는 동시에 계를 받기 위해선 종단에서 정한 의무교육을 반드시 이수하도록 했다.
  • 1994년 4월 15일 (불기 2538년)
    중앙종회가 제113회 임시회를 열어 개혁회의에 종단의 전권을 이양하고 제10대 중앙종회를 자진 해산하다. 이에 앞서 원로회의의 제27대 총무원장 선출 인준 거부에 따른 총무원장 불신임과 종정 불신임 건을 확인하고 의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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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계종宗會(종회) 자진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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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4년 4월 11일 (불기 2538년)
    원로회의가 종단 비상사태를 선포하다.
  • 1994년 4월 10일 (불기 2538년)
    전국승려대회가 오후 1시 조계사에서 스님 2,500여 명과 재가불자 1,0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봉행되다. 4.10 조계사 승려대회에서 △종정 불신임 △총무원장 해임 및 모든 공직 박탈 △개혁회의 출범 등이 결의되다. 개혁회의 의장에 월하月下스님, 부의장에 설조雪照ㆍ종하스님이 추대되고, 상임위원장에 탄성呑星스님이 선임되다. 경찰이 재투입되다.
    관련사료
    조계종'개혁회의'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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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4년 3월 30일 (불기 2538년)
    중앙종회가 제112회 임시회를 열어 제27대 총무원장으로 의현스님을 선출하다.
  • 1994년 3월 26일 (불기 2538년)
    범종추 소속 스님 200여 명이 서울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에서 상무대 비리 진상규명과 의현스님의 총무원장 3선 연임 반대 구종법회를 열고, 총무원장과 집행부 사퇴를 요구하다. 법회 후 청화스님 등 범종추 대표 10여 명이 단식농성에 들어가다.
    관련사료
    종단개혁'승려 2백명 거리행진 '상무대'진상규명등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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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4년 3월 23일 (불기 2538년)
    실천승가회, 선우도량, 중앙승가대학생회, 동국대석림동문회 등 8개 승가단체가 '범승가종단개혁추진회'(상임대표 청화ㆍ시현ㆍ도법스님, 이하 범종추)를 결성하다.
  • 1994년 1월 10일 (불기 2538년)
    관악산 연주암戀主庵 주지에 임명되다.

    연주암은 경기도 과천시 관악산 연주봉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용주사의 말사이다. 통일신라 677년(문무왕 17)에 의상대사가 창건하여 관악사冠岳寺라 하였다. 조선 개국 1392년(태조 1)에는 이성계가 의상대를 중건하고 그의 처남인 강득룡과 서견ㆍ남을 등이 이곳에서 송도를 바라보며 고려왕조를 연모하면서 통곡하였기 때문에 연주대라는 이름이 붙었다. 1396년에는 연주암을 신축하였고, 1411년(태종 11)에는 효령대군이 이건하여 중건하였다. 그 뒤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1868년(고종 5)에 명성황후의 하사금으로 극락전과 용화전을 중수하였고, 1883년에 대방을 중수하고 기와불사를 하였다. 1886년에는 행문幸文이 법당과 나한전을 중수하였고, 1918년에는 경산慶山이, 1929년에는 재운在芸이, 1936년에는 교훈敎訓이 중수하였다. 1975년 송원松園이 대웅전을 신축하였고, 1979년에 연주대와 삼성각을 중수하였으며, 1981년 요사 개축, 1996년 관음전 개축, 2003년 영산전 중수, 2005년 연주대를 대수선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과 관음전, 영산전, 연주대(응진전), 삼성각 등을 비롯하여 효령대군의 진영을 봉안한 효령각이 있다. 대웅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시도유형문화재, 1980년 지정)은 고려 후기 때 세운 것이다.
  • 1993년 11월 18일 (불기 2537년)
    중앙종회가 제110회 정기회를 열어 제8대 종정으로 원로회의가 추대한 서암스님을 수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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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계종 중앙종회 관심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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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3년 3월 9일 (불기 2537년)
    실천불교전국승가회(회장 청화靑和스님, 1992년 창립, 이하 실천승가회)가 종회의원 직선제와 겸직금지를 골자로 한 조계종 종헌종법 개정을 촉구하는 공개청원서를 총무원과 원로회의, 중앙종회에 제출하다. 실천승가회는 불교계의 사회운동을 이끌던 불교정토구현전국승가회(1986년 창립)와 대승불교승가회(1988년 창립)를 비롯해 불교계 진보세력들로 구성된 승가 단체다. 불교정토구현전국승가회는 사회의 억압구조를 타파하고 정토를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지선, 청화 스님 등이 이끌었다. 대승불교승가회는 사회 민주화와 종단 개혁 기치를 내걸고 활동(위 연보 참조)했는데, 90년대 들어와 사회민주화가 제도적으로 뿌리를 내리면서 두 단체가 따로 활동할 이유가 없어졌고 실천불교전국승가회의 깃발을 올리며 결합했다.
  • 1992년 8월 14일 (불기 2536년)
    조계종 제10대 중앙종회 의원이 되다.
    스님은 직능대표 간선으로 피선되다. 제10대 중앙종회(의장 종하鍾夏스님)는 24개 교구본사에서 직접선거로 선출된 48명과 간선선출위원회에서 뽑는 직능대표 27명 등 총 75명의 스님들로 구성됐다. 종회 의원은 본사 또는 주요 사찰의 주지를 겸하고 있었고, 간선선출위원회 위원장은 총무원장이었다. 한편, 조계종 종단이 2개의 총무원 체제로 나뉘어 1년여 가까이 벌인 분립 사태는 제10대 종회 구성을 계기로 미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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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무원'두조각'1년 조계종분규 진정국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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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1년 3월 18일 (불기 2535년)
    안양 삼막사三幕寺 주지를 맡다.
    삼막사는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삼성산(석수1동 241ㆍ54)에 있는 조계종 제2교구본사 용주사의 말사이다. 스님은 삼막사 주지를 1994년 1월 18일까지 맡았다.

    삼막사는 통일신라 677년(문무왕 17) 원효ㆍ의상ㆍ윤필 3대사가 관악산에 들어와 막을 치고 수도하다가 지은 사찰이다. 기록에 의하면,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신라 말 도선이 중건하여 관음사觀音寺라 개칭했다고 한다. 이후 고려 태조가 중수하여 삼막사라 하였고, 1348년(충숙왕 4) 나옹이 이 절에 머무르면서 수도하였다. 조선 개국 때인 1394년(태조 3)에는 왕사 무학이 이 절에서 국운의 융성을 기원했는데, 이러한 인연으로 1398년 왕명에 의해 중건되었다. 그 뒤 몇 차례의 중건과 중수를 거쳐 1880년(고종 17) 의민이 명부전을 짓고 이듬해 칠성각을 지은 뒤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해 명부전ㆍ망해루ㆍ대방ㆍ요사ㆍ칠성각 등이 있다. 대웅전은 무학대사가 석조기둥으로 중수한 다포계양식 건물이며, 내부에 봉안된 탱화와 범종은 광무연간에 제작된 것이다. 청명한 날 망해루에서는 서해가 보이고, 명부전 십대왕상은 이 절의 보물이다. 이밖에도 높이 2.55미터의 삼층석탑과 거북모양의 감로정석조가 있으며, 자연암석에 양각한 아미타삼존불이 있다.
  • 1990년 8월 26일 (불기 2534년)
    조계종 제26대 총무원장에 의현스님이 재선되다.
  • 1988년 3월 (불기 2532년)
    '대승불교승가회'에 참여하다.
    대승불교승가회는 1987년 6월항쟁 당시 불교계의 민주화 열기를 결집시킨 ‘정토구현전국승가회’(1986년 6월 5일 출범)의 맥을 잇는 승가조직이다. 송산松山, 종림宗林, 명진明盡, 자승慈乘, 종태宗跆, 성문性門, 현응玄應, 각신覺腎, 원택圓澤, 설봉雪峰, 주영周暎, 여연如然 스님 주도 아래 30~40대 선승과 학승 등 소장 승려 1백여 명이 참여했고, 초대 회장은 송산스님이 맡았다. 3월 25일 서울 성북구 안암동 소재 개운사에서 창립총회를 열었다. 조직은 산하에 이념교육, 제도교육, 인권, 통일, 노동, 공해대책, 민족문화 등 7개 위원회를 구성하고 부설 민족불교연구소를 두었다. 88 서울올림픽 시기에 동국대석림회 등 10여 단체와 함께 ‘민족화합공동올림픽추진본부’를 결성하여 통일운동을 펼치면서 80년대 불교운동의 한 획을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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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佛敎界(불교계)에 改革(개혁)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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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佛敎(불교) 사회참여운동에 새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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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속의 오늘] 정토구현전국승가회 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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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대중과 국민여러분에게 드리는 글 - 대승불교 승가회 창립 취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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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6년 9월 7일 (불기 2530년)
    해인사에서 열린 10.27법난 6주기 전국승려대회에 참가하다.
    대회에 모인 전국의 2천여 명의 스님들은 불교자주화와 사회민주화, 자주통일을 주장하다. 9.7 해인사 승려대회 집행위원장은 월주스님, 준비위원장 종하스님, 대회장은 해인사 주지 법전스님이 맡다. 대회는 해인사 부방장 혜암스님의 법어로 시작하여 대회사, 경과보고, 불교탄압 실태보고 순으로 진행되다. 이어 사회민주화와 민족자주권 수호를 위한 불교의 사회 참여를 천명하고, 지선스님의 선언문 낭독, 초우스님의 국민에게 드리는 말씀과 발원문, 결의문을 채택하다. 석림회 성조스님의 결의문 낭독 때 지광스님이 오른쪽 손가락 4개를 잘라 ‘불자여 눈을 떠라’라는 혈서를 쓰다. 이후 스님 1천여 명이 혈서와 피켓을 들고 3.5km 떨어진 가야산 국립공원 입구까지 행진하며 ‘불교재산관리법 철폐’, ‘독재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다. 또한, 자주적 민주적 불교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불교관계 악법 철폐와 10.27법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주장하는 한편, 5.3인천사건으로 구속 수배 중인 불자들의 석방 및 정권의 불교 탄압 등에 강력 항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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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려2千(천)명海印寺(해인사)서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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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7 법난을 규탄하며 불교자주쟁취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자 - 10.27 법난 6주기를 맞이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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