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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12개의 검색 결과를 찾았습니다.

상세연보692

  • 1994년 10월 2일 (불기 2538년)
    원로회의가 개혁회의에서 정한 새 종헌안을 인준하다.
    관련사료
    불교 조계종 내달 새종단 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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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4년 9월 27일 (불기 2538년)
    개혁회의가 중앙종회의원과 교구종회에서 선출하는 선거인단에 의한 총무원장 선출 및 본사주지 중앙종회 의원 겸직 금지 등을 담은 종헌 개혁안을 확정짓다. 개혁회의는 △정법종단의 구현 △불교자주화 실현 △종단운영의 민주화 △청정교단의 구현 △불교의 사회역할 확대 등 5대 지표를 설정하고 종단 개혁에 나서 총무원장 선거권을 320여 명으로 확대하고, 교구본사 주지, 중앙종회의원, 교구종회의원 등 종단의 주요 소임자를 직접 선거로 선출케 했다. 또, 종무행정 체계를 총무원, 교육원, 포교원으로 분리해 각각의 역할을 전문성에 근거해 시행할 수 있도록 하고, 총무원의 역할을 보완하고 독주를 견제할 수 있도록 중앙종회의 권한을 확대시켰다. 종회의원은 종단의 다른 주요 소임을 맡지 못하도록 하는 대신 종회에서 직무상 행한 발언에 대해 면책특권을 부여하고, 징계를 할 경우 종회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등 그 지위를 보장했다. 사법기능인 호계원의 소관업무도 확대해 선거 관련 심판 등을 관장하게 하고, 특히 종단 내부에서 일어나는 분쟁을 종단 안에서 처리할 수 있도록 했다. 종단 재정의 공개운영을 원칙으로 함을 종헌에 명문화하고, 사설사암의 종단 등록을 의무화하면서도 운영의 독립성을 인정토록 했다. 사찰이 재산을 처분하기 위해선 감사기관의 조사를 거쳐 총무원의 허가를 얻도록 하고, 총무원이 종단 재산을 처분하기 위해선 중앙종회의 동의를 얻게 했다. 참선수행 도량인 선원을 기초선원과 전문선원으로 구분하고, 기초선원 이수자는 종단의 기본교육 이수자와 동등 자격을 부여해 전문선원에 입방할 수 있도록 했다. 또, 단일 계단을 운영하는 동시에 계를 받기 위해선 종단에서 정한 의무교육을 반드시 이수하도록 했다.
  • 1994년 4월 5일 (불기 2538년)
    혜암慧菴스님(원로회의 부의장)이 소집한 원로회의에서 총무원장 사퇴 및 4월 10일 승려대회 소집을 결의하다.

    교수, 문인, 법조인, 언론인 등 각계 인사들의 폭력배 난동을 방관한 정부 비판과 총무원장 사퇴 요구가 잇따르는 가운데 가톨릭, 개신교, 원불교 지도자까지 사상 유례없는 종교탄압이라며 경찰을 강하게 비판하다.
  • 1994년 2월 5일 (불기 2538년)
    연주암 주지 취임식을 갖다.
    연주암 주지 교체는 총무원 분립 갈등과 관련이 있어 주목을 끌었다. 오전 9시30분쯤 임기 만료된 강남 총무원 쪽 전임 주지(종상스님)를 지지하는 스님과 신도들이 취임식을 저지하는 소동이 벌어졌으나 큰 불상사 없이 입주를 마쳤다.
    관련사료
    연주암 폭력사태없이 주지 검수인계 마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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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4년 1월 10일 (불기 2538년)
    관악산 연주암戀主庵 주지에 임명되다.

    연주암은 경기도 과천시 관악산 연주봉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용주사의 말사이다. 통일신라 677년(문무왕 17)에 의상대사가 창건하여 관악사冠岳寺라 하였다. 조선 개국 1392년(태조 1)에는 이성계가 의상대를 중건하고 그의 처남인 강득룡과 서견ㆍ남을 등이 이곳에서 송도를 바라보며 고려왕조를 연모하면서 통곡하였기 때문에 연주대라는 이름이 붙었다. 1396년에는 연주암을 신축하였고, 1411년(태종 11)에는 효령대군이 이건하여 중건하였다. 그 뒤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1868년(고종 5)에 명성황후의 하사금으로 극락전과 용화전을 중수하였고, 1883년에 대방을 중수하고 기와불사를 하였다. 1886년에는 행문幸文이 법당과 나한전을 중수하였고, 1918년에는 경산慶山이, 1929년에는 재운在芸이, 1936년에는 교훈敎訓이 중수하였다. 1975년 송원松園이 대웅전을 신축하였고, 1979년에 연주대와 삼성각을 중수하였으며, 1981년 요사 개축, 1996년 관음전 개축, 2003년 영산전 중수, 2005년 연주대를 대수선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과 관음전, 영산전, 연주대(응진전), 삼성각 등을 비롯하여 효령대군의 진영을 봉안한 효령각이 있다. 대웅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시도유형문화재, 1980년 지정)은 고려 후기 때 세운 것이다.
  • 1993년 3월 9일 (불기 2537년)
    실천불교전국승가회(회장 청화靑和스님, 1992년 창립, 이하 실천승가회)가 종회의원 직선제와 겸직금지를 골자로 한 조계종 종헌종법 개정을 촉구하는 공개청원서를 총무원과 원로회의, 중앙종회에 제출하다. 실천승가회는 불교계의 사회운동을 이끌던 불교정토구현전국승가회(1986년 창립)와 대승불교승가회(1988년 창립)를 비롯해 불교계 진보세력들로 구성된 승가 단체다. 불교정토구현전국승가회는 사회의 억압구조를 타파하고 정토를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지선, 청화 스님 등이 이끌었다. 대승불교승가회는 사회 민주화와 종단 개혁 기치를 내걸고 활동(위 연보 참조)했는데, 90년대 들어와 사회민주화가 제도적으로 뿌리를 내리면서 두 단체가 따로 활동할 이유가 없어졌고 실천불교전국승가회의 깃발을 올리며 결합했다.
  • 1988년 3월 (불기 2532년)
    '대승불교승가회'에 참여하다.
    대승불교승가회는 1987년 6월항쟁 당시 불교계의 민주화 열기를 결집시킨 ‘정토구현전국승가회’(1986년 6월 5일 출범)의 맥을 잇는 승가조직이다. 송산松山, 종림宗林, 명진明盡, 자승慈乘, 종태宗跆, 성문性門, 현응玄應, 각신覺腎, 원택圓澤, 설봉雪峰, 주영周暎, 여연如然 스님 주도 아래 30~40대 선승과 학승 등 소장 승려 1백여 명이 참여했고, 초대 회장은 송산스님이 맡았다. 3월 25일 서울 성북구 안암동 소재 개운사에서 창립총회를 열었다. 조직은 산하에 이념교육, 제도교육, 인권, 통일, 노동, 공해대책, 민족문화 등 7개 위원회를 구성하고 부설 민족불교연구소를 두었다. 88 서울올림픽 시기에 동국대석림회 등 10여 단체와 함께 ‘민족화합공동올림픽추진본부’를 결성하여 통일운동을 펼치면서 80년대 불교운동의 한 획을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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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佛敎界(불교계)에 改革(개혁)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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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佛敎(불교) 사회참여운동에 새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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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속의 오늘] 정토구현전국승가회 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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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대중과 국민여러분에게 드리는 글 - 대승불교 승가회 창립 취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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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6년 9월 7일 (불기 2530년)
    해인사에서 열린 10.27법난 6주기 전국승려대회에 참가하다.
    대회에 모인 전국의 2천여 명의 스님들은 불교자주화와 사회민주화, 자주통일을 주장하다. 9.7 해인사 승려대회 집행위원장은 월주스님, 준비위원장 종하스님, 대회장은 해인사 주지 법전스님이 맡다. 대회는 해인사 부방장 혜암스님의 법어로 시작하여 대회사, 경과보고, 불교탄압 실태보고 순으로 진행되다. 이어 사회민주화와 민족자주권 수호를 위한 불교의 사회 참여를 천명하고, 지선스님의 선언문 낭독, 초우스님의 국민에게 드리는 말씀과 발원문, 결의문을 채택하다. 석림회 성조스님의 결의문 낭독 때 지광스님이 오른쪽 손가락 4개를 잘라 ‘불자여 눈을 떠라’라는 혈서를 쓰다. 이후 스님 1천여 명이 혈서와 피켓을 들고 3.5km 떨어진 가야산 국립공원 입구까지 행진하며 ‘불교재산관리법 철폐’, ‘독재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다. 또한, 자주적 민주적 불교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불교관계 악법 철폐와 10.27법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주장하는 한편, 5.3인천사건으로 구속 수배 중인 불자들의 석방 및 정권의 불교 탄압 등에 강력 항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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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려2千(천)명海印寺(해인사)서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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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7 법난을 규탄하며 불교자주쟁취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자 - 10.27 법난 6주기를 맞이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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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기 544년)
    선우도량'이 발족되다. 청정가풍을 되살리는 수행과 교육을 중시한 선우도량은 도법, 수경, 현응 스님 등이 이끌었고, 대승불교승가회 쪽 스님들이 많이 합류하다.
  • 1984년 5월 25일 (불기 2528년)
    수원포교당 주지를 맡다.
    수원포교당은 현재 수원사水原寺로 개명했으나 당시는 화광사華光寺로 불렸다.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남수동 92번지에 위치해 있다. 스님은 수원포교당 주지를 1986년 1월 23일까지 맡았다.

    수원포교당은 1920년 4월 8일 당시 용주사 주지 대련스님이 일반 대중들에게 불교를 포교하기 위해 법당과 관음전, 요사를 지은 게 시작이었다. 사찰 창건 이전 이곳에는 서낭당이 있었다고 하며, 지금까지 수령 300년 정도의 느티나무가 있다. 당시 지은 법당이 현재의 극락대원전이며, 관음전이 현재의 정토수행관이다. 1927년 손계조 포교사가 옥돌관음상을 봉안했고, 1957년 화광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1964년 삼존불 후불탱화, 칠성탱화, 독성탱화, 산신탱화가 극락대원전에 봉안되었고, 1973년 정하스님이 석조아미타여래상을 조성하면서 법당을 중수, 단청했다. 1980년 법전스님이 삼존불을 개금했으며, 1981년 정락스님, 1984년 자승스님 노력으로 불교 포교의 중심 역할을 하는 전국 3대 포교당의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다.
    관련사료
    〈34〉수원 수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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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불교조계종 수원사 사이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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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5년 3월 (불기 2519년)
    동화사 불교전문강원(現 승가대학)을 졸업하다.
  • 1972년 10월 15일 (불기 2516년)
    해인사에서 지관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하다.
    관련사료
    전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스님 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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