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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52개의 검색 결과를 찾았습니다.

상세연보851

  • 1998년 12월 6일 (불기 2542년)
    중앙종회와 총무원 측 스님과 신도 등 1,500여 명이 오후 2시 서울 광화문빌딩 앞에서 '종헌종법 수호와 공권력 규탄 범불교도 대회'를 열다.
    정화개혁회의 스님과 신도 700여 명은 조계사에서 '조계사 대웅전 방화 규탄 대회'를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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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쪼개진 조계종 휴일'勢(세)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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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8년 11월 30일 (불기 2542년)
    종헌종법 수호를 위한 전국승려대회(대회장 탄성스님)가 오후 2시30분 조계사 앞에서 스님 1,200여 명과 신도 등 2,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리다. 대회에 참석한 스님들은 월하 종정 불신임과 정화개혁회의의 즉각 해산 및 총무원 청사에서 철수, 총무원장 선거 실시 등을 결의하다. 대회를 마친 스님과 신도들이 총무원 청사 진입을 시도, 이를 저지하는 정화개혁회의 측 스님들과 폭력 사태가 벌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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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계종 폭력 밤샘 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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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8년 11월 14일 (불기 2542년)
    원로회의 스님 7명이 서울 양재동 구룡사에서 종정 월하스님이 참석한 가운데 회의를 열어 중앙종회 해산과 월주 총무원장의 해임을 결의하다. 또 혜암 원로회의 의장을 제명하고, 새 의장에 벽암 부의장을 선출하다. 이날 원로회의는 총원 22명 중 7명이 참석, 8명의 위임장을 받다. 혜암스님은 원로회의 소집을 거부하여 불참했고, 적법 절차를 거치지 않아 효력이 없다고 주장하다. 중앙종회 의장 법등스님도 원로회의법에 위배된다는 성명을 발표하다.
  • 1998년 11월 12일 (불기 2542년)
    종정 월하스님이 "제2의 정화불사가 내 뜻"이라 밝히다.
  • 1998년 10월 (불기 2542년)
    제29대 총무원장 선거에 월주月珠스님 3선 출마 여부를 놓고 공방이 벌어지다. 월주스님은 80년 6개월여 간 총무원장(제17대)으로 재임한 바 있어 출마의사를 밝힌 다른 스님들이 "월주스님은 총무원장 3선에 해당하여 1차에 한해 중임할 수 있다는 종헌에 위배된다"며 불출마를 종용하다. 반면, 월주스님 측은 "당시 신군부에 의해 강제 사퇴당한 것으로 94년 제정 공포된 종헌을 소급 적용할 수 없다"고 반발하다. 총무원장은 94년 종단 개혁을 통해 제정 공포된 종헌에 따라 전국 24개 교구에서 뽑은 선거인단 240명과 중앙종회의원 81명이 선출하는데, 교구본사 주지는 교구종회의원 2명을 포함해 선거인단 12명을 결정하도록 되어 있어 큰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해 8개 교구에서 임기 만료로 치러진 주지 직접 선거는 총무원장 선거 대리전 양상을 띠었다.
  • 1998년 2월 (불기 2542년)
    연주암의 환경친화적 불사와 무료 점심 공양이 회자되다.
    스님이 주지에 부임한 이래 공사가 중단돼 있던 선불전을 천수관음전으로 바꿔 불사를 회향, 지하에는 현대식 주방시설과 식탁을 갖췄다. 공양간 한켠에 기도객들이 묵어갈 수 있는 방사를 지었고, 대중스님들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요사채도 보수했다. 연주암 상징인 연주대에 기와불사와 종불사도 마쳤고, 효령대군 영정은 종각 위쪽에 효령각을 신축해 모셨다. 고지대라 겪는 식수난을 3년여에 걸친 시추 노력 끝에 암반수를 찾아 해결했고, 오폐수 및 화장실 자체 정화 시설을 만들었다. 또한, 사찰 토지를 무단 사용중이던 기상대 관측소를 철거시켰고, 군부대로부터 헬기장 유류고 등 1,500평을 반환받았다. 연주암 복원을 위해 관악사지 발굴사업을 추진하여 1250나한 조성불사와 함께 나한기도도량으로 가꿔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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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주암이 달라졌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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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지 자승스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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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7년 12월 (불기 2541년)
    연주암이 위탁 운영하는 조계종 사회복지재단 과천종합사회복지관의 관장을 맡아 지역 복지사업과 불교복지에 원력을 세우다.
    과천 시민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지역신문 『과천21』 발행인을 맡다.
  • 1997년 8월 5일 (불기 2541년)
    연주암 신도들의 신행활동을 독려하다.
    연주암 신도들이 과천 등지 경로당에서 점심 공양과 무의탁 노인 성금 보시 관련해 스님이 "신도회의 자발적인 노력에 감사한다"며 "사찰에 찾아오기만을 기다리기보다는 사회의 어두운 곳을 직접찾는 보살행이 참불자임"을 강조하다.
  • 1996년 11월 22일 (불기 2540년)
    '환경보존과 민족문화 수호를 위한 전국 본말사 주지 결의대회'가 오후 2시 조계사에서 열리다. 종단 산하 전국 본말사 주지스님 3천여 명과 신도 500여 명이 참석하다. 결의문을 통해 "가야산ㆍ모악산 등 전국의 사찰주변 자연환경이 행정관료와 기업가들에 의해 훼손되는 사태를 주목해왔다"며, 사찰 주변의 무분별한 개발 중단과 불교계에 대한 외부개입 배격을 요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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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계종 10년만에 대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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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6년 4월 (불기 2540년)
    중앙종회가 제120회 정기회에서 전남 장성 백양사에 조계종 5번째 총림인 고불古佛총림을 설치키로 결의하고 강원 율원 선원 염불원을 갖추도록 결정하다.
  • 1995년 6월 22일 (불기 2539년)
    중앙종회가 제117회 임시회를 열어 개혁회의 전후과정에서 징계를 당한 33명에 대해 사면복권 및 징계경감 조치하다. 한편, 지방자치선거와 남북 쌀회담을 앞두고 불교교단이 분열로 비칠 수 있는 행동을 자제키로 결의하다. 또한, 조계사 내 농성 중이던 한국통신노조원들에 대한 경찰의 강체 해산 관련해 정부의 사과와 책임자 문책을 촉구하다. 6월 6일 조계사에 경찰이 투입됐고, 16일 이홍구 총리가유감을 발표한 바 있다.
  • 1994년 10월 2일 (불기 2538년)
    원로회의가 개혁회의에서 정한 새 종헌안을 인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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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 조계종 내달 새종단 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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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4년 9월 27일 (불기 2538년)
    개혁회의가 중앙종회의원과 교구종회에서 선출하는 선거인단에 의한 총무원장 선출 및 본사주지 중앙종회 의원 겸직 금지 등을 담은 종헌 개혁안을 확정짓다. 개혁회의는 △정법종단의 구현 △불교자주화 실현 △종단운영의 민주화 △청정교단의 구현 △불교의 사회역할 확대 등 5대 지표를 설정하고 종단 개혁에 나서 총무원장 선거권을 320여 명으로 확대하고, 교구본사 주지, 중앙종회의원, 교구종회의원 등 종단의 주요 소임자를 직접 선거로 선출케 했다. 또, 종무행정 체계를 총무원, 교육원, 포교원으로 분리해 각각의 역할을 전문성에 근거해 시행할 수 있도록 하고, 총무원의 역할을 보완하고 독주를 견제할 수 있도록 중앙종회의 권한을 확대시켰다. 종회의원은 종단의 다른 주요 소임을 맡지 못하도록 하는 대신 종회에서 직무상 행한 발언에 대해 면책특권을 부여하고, 징계를 할 경우 종회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등 그 지위를 보장했다. 사법기능인 호계원의 소관업무도 확대해 선거 관련 심판 등을 관장하게 하고, 특히 종단 내부에서 일어나는 분쟁을 종단 안에서 처리할 수 있도록 했다. 종단 재정의 공개운영을 원칙으로 함을 종헌에 명문화하고, 사설사암의 종단 등록을 의무화하면서도 운영의 독립성을 인정토록 했다. 사찰이 재산을 처분하기 위해선 감사기관의 조사를 거쳐 총무원의 허가를 얻도록 하고, 총무원이 종단 재산을 처분하기 위해선 중앙종회의 동의를 얻게 했다. 참선수행 도량인 선원을 기초선원과 전문선원으로 구분하고, 기초선원 이수자는 종단의 기본교육 이수자와 동등 자격을 부여해 전문선원에 입방할 수 있도록 했다. 또, 단일 계단을 운영하는 동시에 계를 받기 위해선 종단에서 정한 의무교육을 반드시 이수하도록 했다.
  • 1994년 4월 15일 (불기 2538년)
    중앙종회가 제113회 임시회를 열어 개혁회의에 종단의 전권을 이양하고 제10대 중앙종회를 자진 해산하다. 이에 앞서 원로회의의 제27대 총무원장 선출 인준 거부에 따른 총무원장 불신임과 종정 불신임 건을 확인하고 의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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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계종宗會(종회) 자진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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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4년 4월 10일 (불기 2538년)
    전국승려대회가 오후 1시 조계사에서 스님 2,500여 명과 재가불자 1,0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봉행되다. 4.10 조계사 승려대회에서 △종정 불신임 △총무원장 해임 및 모든 공직 박탈 △개혁회의 출범 등이 결의되다. 개혁회의 의장에 월하月下스님, 부의장에 설조雪照ㆍ종하스님이 추대되고, 상임위원장에 탄성呑星스님이 선임되다. 경찰이 재투입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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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계종'개혁회의'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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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4년 4월 5일 (불기 2538년)
    혜암慧菴스님(원로회의 부의장)이 소집한 원로회의에서 총무원장 사퇴 및 4월 10일 승려대회 소집을 결의하다.

    교수, 문인, 법조인, 언론인 등 각계 인사들의 폭력배 난동을 방관한 정부 비판과 총무원장 사퇴 요구가 잇따르는 가운데 가톨릭, 개신교, 원불교 지도자까지 사상 유례없는 종교탄압이라며 경찰을 강하게 비판하다.
  • 1994년 2월 5일 (불기 2538년)
    연주암 주지 취임식을 갖다.
    연주암 주지 교체는 총무원 분립 갈등과 관련이 있어 주목을 끌었다. 오전 9시30분쯤 임기 만료된 강남 총무원 쪽 전임 주지(종상스님)를 지지하는 스님과 신도들이 취임식을 저지하는 소동이 벌어졌으나 큰 불상사 없이 입주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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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주암 폭력사태없이 주지 검수인계 마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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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4년 1월 10일 (불기 2538년)
    관악산 연주암戀主庵 주지에 임명되다.

    연주암은 경기도 과천시 관악산 연주봉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용주사의 말사이다. 통일신라 677년(문무왕 17)에 의상대사가 창건하여 관악사冠岳寺라 하였다. 조선 개국 1392년(태조 1)에는 이성계가 의상대를 중건하고 그의 처남인 강득룡과 서견ㆍ남을 등이 이곳에서 송도를 바라보며 고려왕조를 연모하면서 통곡하였기 때문에 연주대라는 이름이 붙었다. 1396년에는 연주암을 신축하였고, 1411년(태종 11)에는 효령대군이 이건하여 중건하였다. 그 뒤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1868년(고종 5)에 명성황후의 하사금으로 극락전과 용화전을 중수하였고, 1883년에 대방을 중수하고 기와불사를 하였다. 1886년에는 행문幸文이 법당과 나한전을 중수하였고, 1918년에는 경산慶山이, 1929년에는 재운在芸이, 1936년에는 교훈敎訓이 중수하였다. 1975년 송원松園이 대웅전을 신축하였고, 1979년에 연주대와 삼성각을 중수하였으며, 1981년 요사 개축, 1996년 관음전 개축, 2003년 영산전 중수, 2005년 연주대를 대수선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과 관음전, 영산전, 연주대(응진전), 삼성각 등을 비롯하여 효령대군의 진영을 봉안한 효령각이 있다. 대웅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시도유형문화재, 1980년 지정)은 고려 후기 때 세운 것이다.
  • 1993년 7월 28일 (불기 2537년)
    중앙종회가 제109회 임시회를 열어 재산 등록 안건 등을 다루다. 관련해 종헌에 재산 등록 불응 사찰 주지에 대한 총무원장의 직권 면직 규정(제73조)을 개정하다.
    관련사료
    조계종'재산등록'종헌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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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3년 3월 9일 (불기 2537년)
    실천불교전국승가회(회장 청화靑和스님, 1992년 창립, 이하 실천승가회)가 종회의원 직선제와 겸직금지를 골자로 한 조계종 종헌종법 개정을 촉구하는 공개청원서를 총무원과 원로회의, 중앙종회에 제출하다. 실천승가회는 불교계의 사회운동을 이끌던 불교정토구현전국승가회(1986년 창립)와 대승불교승가회(1988년 창립)를 비롯해 불교계 진보세력들로 구성된 승가 단체다. 불교정토구현전국승가회는 사회의 억압구조를 타파하고 정토를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지선, 청화 스님 등이 이끌었다. 대승불교승가회는 사회 민주화와 종단 개혁 기치를 내걸고 활동(위 연보 참조)했는데, 90년대 들어와 사회민주화가 제도적으로 뿌리를 내리면서 두 단체가 따로 활동할 이유가 없어졌고 실천불교전국승가회의 깃발을 올리며 결합했다.